A Yellow Shell Without Color

블라인드를 올리는데 저 위에 뭔가 보였다. *노란 무당벌레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원단이 말려 들어가기 바로 직전 즈음에. 일부러 줄을 탕탕 치며 올리는데도 꼼작 않는다. 음… 조금 귀여우니 까짓거, 나중에 올리지. 굳이 주저 앉아 창문을 열었다.

아, 가을 하늘이네.

조심스럽게 무당벌레를 때내어 손바닥에 올려놨다. 죽은 것 같아 보이더니 곧 손등으로 그리고 손가락 사이를 야무지게 기어다녔다. 방충망을 열고 손을 저만치 내밀어줬다. 밖이라는 걸 어째 알았는지, 등딱지에서 날개가 삐져나왔고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같더니 이내 약지 끝을 떠났다. 하늘이 너무 예뻤다.

추석 연휴 내내 (나만) 괴롭히던 모기 한 마리를 끝내 잡았다. 그저 물리기만 할 뿐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는데, 무당벌레를 날려보내고 돌아서는 순간 눈 앞을 휘청휘청 스쳐갔다. 그냥 존나 휘갈겼지 뭐.

그 둘이 내 방에서 얼마나 함께 있었는지 모르겠다. 쓰러질 듯 말 듯한 여름은 어김없이 어느 순간부터 냉기를 품는다. 요 며칠동안 처럼. 두 계절이 얼마나 오랫동안 공존하는지 정말 어느 하나는 떠나버리는 건지, 알 수 없다. 그저 가을이 낳은 무당벌레와 끝여름의 모기는 각각 하늘로, 쓰레기통으로 간 것 밖에는.

*무당벌레는 봄에 출현하여 포식활동과 산란을 하다가, 여름잠을 잔 뒤 9월경 가을에 다시 등장하여 포식활동, 번식, 산란을 하는 한살이를 갖고 있다. […] 부화한 무당벌레 성충은 처음에는 색상이 없이 노란색의 등껍질을 갖고 있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몸이 굳어지면 개성강한 경계색(빨간색, 주황색)을 갖춘다. – Wikipedia

 

2019.9.15 상왕십리

When Nothing Is For Sure, Anything Can Happen

1.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꿈을 그린다. 작대기 하나만 휘두르면 언제든 앙상블이 완성될 것 처럼. 지난한 시간만이 약속하는 건 애정 없는 일을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아는 척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정도. 혹은 일과 보편적 애증의 관계가 되게끔 보증을 서준다거나.

아침에 일어나고 싶게끔 만드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인생이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될 일은 아니잖아그게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에 영감을 주고 살만한 가치가 있도록 느껴지게 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타인이 뭐라해도 내 삶의 주인은 나잖아. 스스로 주인이 돼서 결정해야 된다. 납득할만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단 한 번 뿐이다.

 

2.

대체로 시대를 막론하고 현자들은 같은 말을 해왔고, 어느 시대든 절대다수를 점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은 언제나 그와 반대되는 일을 해왔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런 현상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볼테르는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와 똑같이 어리석고 불량한 상태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일지도.

 

3.

“코타르 증후군 (Cotard’s syndrome)은 매우 희귀한 정신 질환으로, 환자는 자신이 죽었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부패 중이거나, 혈액 전체 또는 중요 내부 장기 (예를 들어 심장)를 잃어버렸다고 믿게 된다. 환자 중 희귀한 경우에서는 자신이 불멸의 존재라고 믿기도 한다.” – Wikipedia

 

2019.9.11 상왕십리

4월 10일, EHT 팀이 인류 과학사 최초로 블랙홀 촬영에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후, 유튜브 추천영상에 TED Talks 하나가 올라왔다.
제목은 “How to take a picture of a black hole”.
3백만 뷰의 이 영상이 퍼블리싱된 날짜는 2017년 4월 28일.
이틀 후도 아닌, 2년 전 이라니! #respect

촬영된 블랙홀은 지구로부터 5500만 광년 떨어져 있다고 한다.
공개된 지 2주 밖에 안 된 BTS 뮤비는 벌써 2억 뷰가 넘었다나.

인류는 아마 멸망할 거야.

밤 늦게 비를 맞으며 퇴근해도 좋다. 요즘은.

타인에게서 자신과 같은 영혼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긴 잠에서 깨어나는 게 아닐까.

오후 3시 + 스프레드시트 + 빌 에반스 + 노이즈 캔슬링 = 😪

꿈을 꿨다.

밴프의 밤하늘과 달빛과 쨍한 공기가 생각나는 노래.
청춘이라는 이름의 기적,
그때는 몰랐었네.

해가 지는 노오란 청계천에서는 이 노래를.

If Only We Were Young

1.

아침 알람소리로 하루를 여는 삶을 다시 시작했다. 여전히 한 번만에 일어나지 못하고, 어김 없이 아침밥을 거르고, 온통 잿빛의 하늘만 남은 출근길이지만, 삶의 무게는 꽤 가벼워졌달까. 오로지 감상적 인풋과 물질적 소비만 존재했던 지난 (행복했던) 몇 개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역시 창조적인 아웃풋이 없는 인생은 단조롭고 건조하기만 하다. 아, 노동의 숭고함이여. 아, 월급의 소중함이여..!

 

2.

넷플릭스의 백미는 역시 다큐멘터리가 아닐지. 최근에 본 건 “D-7 카운트다운“이라는 다큐의 “카시니의 마지막 여정” 에피소드. NASA의 토성 무인 탐사선 “카시니(Cassini)”의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으레 초이지적이고 기승전 “아메리칸 프라이드”로 격파할 법한 소재이나, 의외로 인간적인 측면을 담담하게 어루만진다. 카시니는 무려 20년 동안 토성과 그 주변 위성들을 탐사했다는데, 우리가 본 거의 모든 토성의 이미지들과 관련 정보들은 이 카시니를 통해 얻게 된 것이라고. 지구로부터 12억 8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기계에 한 평생을 바친 사람들의 엔딩 스토리가 너무나도 생경하고 감동적이다. 그들이 아니면, 그들의 가족이 아니면, 혹은 미국인이 아니라면 절대 경험할 수 없고 느껴볼 수 없는 형태의 감정들. (일본인들의 “하야부사“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에서도 우리가 손수 만든 범우주적 드라마에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날이 올까. 난 안 올 것 같아. 그래서 미국만세.

 

3.

죽음과 가장 멀리있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지 않을까.
며칠 전에 회사 동료와 대화 중 들은 말. 아이슬란드같이 경이롭고 핀란드처럼 아름답다. 아마 올해 최고의 “인풋” 중 하나가 아닐지.

 

4.

그러고보니 아이슬란드와 핀란드의 기억을 곱씹을 새도 없이 한 해가 지나갔네. 아직 불완전 연소된 여운, 그 위를 불투명하게 덮고 있는 얇고 무른 기억의 레이어, 그리고 알람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는 지금.

And I know in the past we wanted separate roles
Then I chose you, yeah
And I’ve seen the kind of dirt that took my baby from me
Oh, I never told you
Anytime I feel my week is nearly over
I lay awake in all kinds of darkness, Polly

Oh no no no
If only we were young
You’d make me feel hung up

And I know in the past you left me with no heart
How cheap were the nights you used to keep me warm?

Girl no no no
If only we were young
You’d make me feel warm

과거는 마치 블랙홀 같아서,
가까이 갈 수록 더 강하게 끌어 당기고
결국 나는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