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onstruction

 

0. 시간의 구성

사람의 뇌에는 시간을 인지하는 감각기관이 없다고 한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것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변화가 많으면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고, 큰 변화가 없다면 시간의 경험은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즉, 시간에 대한 지각은 일반적인 감각기관(오감)이 아닌 정보의 종합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 시간은 느끼는 것이 아닌 “구성(construction)” 된다는 말이다.

 

1. 여름

얇은 벽과 투명한 창문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자연을 원망하고 인간성 말살적 세계를 운운하고 있다. 제법 그럴싸했던 타이틀을 내려놓고 난 후 가장 걱정됐던 것 중에 하나는 의외로 전기세. 바깥보다 방구석에서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지난 한 달 동안, 천정 한 켠의 에어컨은 내 존재의 이유였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에어컨 발명가를 신격화하기 일쑤였고 나도 좋아요를 눌러댔다. 그러나 이 백색가전이 연신 뿜어내는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은 그 옆의 희푸른 형광등 불빛만큼이나 디스토피아적이다. 아마 전기세도 세기말적인 느낌으로 나오겠지. 전기세기말도안돼.

 

2. 경험의 과소평가

부산에서 인의형과 헤어진 후 뜻밖의 하루살이 무전여행을 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부산포항고속도로라는 길을 달렸는데, 광안대교를 타고 넘어가니 자연스레 이어지는 게 재밌었던 것 같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잠이 엄청 쏟아졌는데, 옆의 호사미 수다에 일일이 대꾸해주며 수백 번 잤다 깼다를 반복하니 기분이 떨 핀 것 마냥 좋았던 것 같기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 도전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나이를 처먹을 수록 경험을 과소평가하게 된다는 둥, 으레 짐작하지 말고 일단 질러야제 라며 취하듯 말했던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대쉬보드 넘어의 풍경은 화려하지도, 크게 바뀌지도 않았다.

 

3. 8월

지난 8월은 시간을 자각적으로 “구성” 할 수 있을 정도로 별 일 없었던 것 같다. 나름 거사를 치루고 났으니 자고 일어나면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고 모든 사물이 다르게 느껴지고 햇살이 나에게만 쏟아질 것만 같은,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에 그렇게 빨리 일어나지도 못하는 게 걍 현실. 어쩌면 그런 사치스런 게으름이 그리웠는지도.

“There is no construction without deconstruction” 이라는 문구를 좋아한다. 공교롭게도 8월은 나의 지난 시간들을 철저하게 해체하고 허무는 한 달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한참 남은 것 같은데 먼지가 너무 많이 나서 이게 또 걱정. 적당히 물 좀 뿌려줘야 하나.

영원할 것만 같던 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저녁으론 기분 좋게 쌀쌀하기까지.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온다.

 

4. Negro Swan

이번 Blood Orange 앨범 너무 좋다. 앨범 이름도 존나 멋져… 

 

2018.9.9 상왕십리동

2018. 9. 2 광안리

The Square, 2017

Neither an End nor a Beginning

 

1. 비전

지난 7월 2일 월요일, 사람들을 모으고 나의 마지막 결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애써 침착하게 보이려고 한 건지, 아니면 마치 예상이나 했던 건지 대부분 여느 지루한 회의시간인 것 마냥 별 표정이 없어 보였다. 나는 가급적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자꾸 가슴이 화끈 거리고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식히느라 애를 먹었다. 사무실이 두 군데에 있어 두 번씩이나. 아마 다들 비슷한 고통이었으리라.

“자금 투자의 어려움 때문에 회사를 더이상 운영할 수 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핑계(?)였다. 사실 사업자금을 투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최후의 순간까지 여럿 루트로 존재했다. 6년 여 동안 회사를 운영하면서 30억이 넘는 돈을 투자 받았는데/했는데, 마지막 데스벨리 탈출을 위한 고작 2-3개월치의 자금이 없어서 공든탑을 무너뜨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에게 없는 건 돈이 아니라 비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온라인 편집샵이라는 사업과 그 시장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떠한 매력과 미션도 찾을 수 없었다. 피벗을 계획하며 어느 정도의 염려와 감안은 했으나, 뚜껑이 열리고 난 후 그 무의미함이 주는 강렬함은 마치 과거에 건조하고 타성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때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더라. 정말 괴로운 시기였는데, 지난 3개월여 동안이 꼭 그랬다.

처음 회사를 준비할 때부터 꿈꿨던 건,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좀 더 즐겁고 특별하며 환상적인 경험을 줄 수 있을까’ 였지, (멍청하게도)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에 대한 시장경제적 영악함은 내 스페셜티가 아니었다. 도떼기마켓은 그 순진한 꿈의 한 굵은 줄기였고 내겐 분명 인생을 걸어볼 만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단적으로 “많은 상품을 싸게 많이 파는” 것이 사업의 거의 모든 총량인 온라인 편집샵에서는 내 스스로 의미있는 원동력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내적 가치 대립과 이념적 갈등 때문에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하물며 대표라는 인간부터 사업 목적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조직원들은 뭐를 바라보고 따라야 하나. 비단 비전에 대한 개인적인 가치관 차원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치명적인 사안들도 산재했다. 하지만 미숙한 경영 능력, 넉넉지 못한 급여, 어설픈 조직 문화 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회사가 성장하고 전진할 수 있었던 건 도떼기마켓의 선명하고 뾰족한 사업 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 끝이 몹시 무뎌져 버렸다. 투자를 얼마나 받던 간에, 더이상 그 끝을 깎아 낼 열정도 자신감도 남아 있질 않았다.

 

2. 도떼기마켓

그렇다면 도떼기마켓은 왜 하필 온라인 편집샵으로 피벗했는가 라는 의문만 남는다. 도대체 왜.

도떼기마켓 서비스는 작년 상반기까지 지난한 매출 성장과 높은 비용 구조로 인해 사업 전반에 걸쳐 메스를 대야 하는 상황이었다. 경영 악화라기 보단 스타트업이 통상 겪을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의 수정과 검증 이터레이션 시기였다. 이슈가 되었던 핵심 골자를 몇 개 꼽자면: (아마 리세일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업자들은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지 않을까)

  • 매입 서비스의 유저 경험 개선 (혹은 비즈니스 모델 수정) 
  • 매입 시스템 및 운영 인프라의 비용구조 개선
  • <낮은 유저 만족도 → 매입물량 정체 → 판매물량 정체 → 매출 정체> 로 이어지는 악순환 개선
  • 국내 시장에서 패션 리세일 비즈니스의 유닛 이코노믹스 실현 가능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법과 빠른 실행 방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회사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옵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당시엔 어떻게든 반드시 매출을 올려야만 했고 최선의 대안을 한 곳에 집중해야만 했다. 이를테면 마지막 원샷이었던 셈. 그러나 오히려 커머스 플랫폼을 직접 개발하고 의류를 팔아봤다는 경험과 새상품 판매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이 결국 온라인 편집샵이라는 독이 든 사과를 만들어낸 것 같다.

피벗을 결정하던 당시에는 나름 심도 깊은 연구와 잠 못 이루는 고뇌를 한다고 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너무나도 얄팍하게 생각하고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었던 게 아니었던가. 후회는 없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아 있다. (사실 완전한 피벗은 아니었다. 도떼기마켓은 유니온풀 플랫폼 내에 입점한 형태로 존속했고, 매출원 확보 후 다시 고도화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비록 도떼기마켓의 비즈니스 모델은 미완 혹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함께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시장을 개척했던 모든 유니온풀러들은 위대한 승리자라고 생각한다. 새것과 중고의 관계는 마치 상하수도의 그것과도 같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매일 사용하는 상수(새것)는 어떻게든 하수(중고)가 된다. 하수가 깨끗이 정화되고 효율적으로 재사용될 수 있어야 상수 역시 무의식의 영역에 온전히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사물도 마찬가지. 도떼기마켓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다시 제 2의 도떼기마켓을 만들겠지. 그날이 온다면, 우리의 치열했던 과거가 그들에게는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3. 2018년 7월

회사 문을 닫는 과정은 마치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심신이 분쇄되는 듯한 고통과 허무함의 연속.

  • 회사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긴 했지만 영업 종료한다는 생각은 최후의 순간까지 하지 않았다.
  • 어찌 그리 신속하게 소식을 접했는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다. 오히려 나보다 격앙되어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 상황을 기회 삼아 잇속 챙기려고 덤비는 상식 이하의 부류도 있었다.
  • 굳이 더이상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도 끝까지 남아 도와준 사람들,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절대 잊지 않으리라.
  • 폐업으로 인해 의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20여 명의 퇴직금 총 1억 5천만 원 가량을 정상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나름 마지막까지 구성원들에 대한 도리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 부족한 퇴직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거의 모든 사무실 집기들을 발품 들여 팔았다. 하나하나 사무실을 떠나 보낼 때의 기분은 슬픔을 초월해서, 몹시 엿같더라. 마지막 남은 책상들이 빠지고 텅 빈 사무실, 불과 몇주 전만 해도 북적이고 분주했던 모습들의 잔상이 눈 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그러다가도 집에 가서 맥도날드 처먹으며 슛포러브 볼 땐 낄낄거리고. 또 다음날 존나 울적하고 시발. 감정의 킹다 카 라이드.
  • 끊임없이 밀려오는 자책감과 정체 모를 두려움은 자연스레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강제적으로 되뇌이게 만들었다. 육체는 현재를 바라보지만 정신은 온전히 과거에 갇혀버린.

7월, 지독했던 더위만큼이나 견디기 벅차고 혼미했던 한 달이었다.

 

4. 주식회사 유니온풀

기업을 만들고 경영한다는 건 정말 멋지고 가치있는, 고귀한 영역의 일인 것 같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납세까지 하는 기업 경영인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존경 받아야 할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대를 역행하는 규제들과 균형을 잃은 근로기준법,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특유의 반기업 정서 속에서 한평생 기업을 끌고 가시는 분들을 보면 경외심 마저 든다.

나 역시 유니온풀을 남 부럽지 않은 좋은 기업으로 만들고 싶었다. 나름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진실되게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밥 먹듯 주 100시간 넘게 일했고, 치열하게 공부했으며, 회사와 구성원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도 허다했다. 부족했지만 항상 나누고 베풀기 위해서도 애썼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루의 반복이었지만 끝내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비록 회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니온풀을 운영하면서 뇌의 허물을 수십 번은 벗겨낸 것 마냥 다양한 분야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룬 것 같다.)

한편, 산이 높으면 골도 깊기 마련. 창업자의 삶은 대부분 희생과 번뇌로 점철되는 것 같다. 모든 창업자들이 나와 같진 않겠지만, 나는 지난 시간 대부분을 온전히 나 자신으로서 살지 못했다. 회사를 위해 삶의 많은 부분들을 포기하고 타협해야만 했다. 가족과의 시간, 연애, 사교생활, 심지어 성격까지. 언젠가부터 일을 떠나서는 제대로 된 기쁨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가족과의 대화, 친구의 경사, 심지어 나의 건강 보다 중요했던 건 구성원들의 안녕과 프로젝트의 성공여부일 뿐이었다. 매사에 나보다 회사가 먼저였고, 단 한 번도 편히 쉬질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을 하지 않을 땐, 회사 밖에서는 편집증적이고 사이코패틱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여유도 유머도 낭만도 없는 무미건조한 생명체. 무엇보다도 이런 바스러질 듯한 감정/정신상태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절제하며 다스려야 하는 현실이 가장 힘들었다.

“이 순간만 지나면 덜 바빠지겠지, 괜찮아지겠지.” 회사가 잘 되는대로 또는 골이 깊어 지는대로, 기업 경영에 덜 바빠지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온전한 나를 찾을 수 있는 순간 역시 언제인지 알 수 없다. 혹여 다른 스타트업 대표들 삶의 궤적은 어떠할까. 온전히 그들 자신으로서 살고 있을까. 일을 떠나서는 행복한 인생일까. 내가 유별난 걸까.

Whatever.
여기서 잠시 멈춘 게 오히려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나는 돈 버는 일과는 상관 없는 곳에서 기쁨을 찾고 싶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길을 잃은 건 가야할 길이 있기 때문이겠지. 끝도 시작도 아닌.

 

2018. 8. 1 역삼동